‘코 푸는 선생님’의 추억.그때는 콧물을 흘린 아이들이 많았다

[암을 마주하며 살아간다]’코 푸는 선생님’의 추억.그때 콧물 흘린 아이들이 많았던 사사키 쓰네오(도쿄도립병원 명예원장)

내가 아직 초등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야마가타에 있는 생가 앞은 논에서 동네와 역 쪽에는 조금 들뜬 건널목을 건넙니다.선로 건너 편에는 생선 가게가 있고 그 안쪽에 외가가 있었습니다.자갈길이었습니다만, 여름에는 아이스 캔디의 깃발을 세운 자전거가 겨울에는 마소리이 지나갔습니다.어느 때든 나는 혼자 외가에 가다가”코를 풀다 선생님”를 만났습니다.코를 풀다 선생님은 콧물이 나오는 아이를 찾으면, 그 아이를 붙잡고 작게 썰은 신문지로 코를 깨물고, 닦아 주고 있었습니다.아이의 얼굴에는 검은 신문의 잉크 자국이 납니다 우리 애는 그게 싫고, 코를 깨물어 줄 선생님을 발견하면 늘 뛰고 도망 갔어요.그러나 그때는 저는 선생님이 붙잡혀서 선생님이 코 풀고 닦아 주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왠지 새파란 코를 쓰고 있는 아이가 많이 있었습니다.그 아이의 옷 소매는 콧물을 몇번이나 닦아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지금 인터넷으로 알아보면 코를 풀다 선생님 경력이 쓰이고 있습니다.그에 의하면,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힘들게 영어, 그림, 음악 등 여러가지를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선생님은 미국에서 배운 것을 사람들의 생활에 활용하려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특히 아이들은 “코를 풀다”이라는 관습이 없는 선생님은 매일같이 마을을 다니며 아이들은 코를 씹는 것의 소중함을 말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코를 풀다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두경부 암은 대수술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던 콧물에 직접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전에는 비염, 중이염이 되는 사람이 지금보다 많은 것 같았습니다.제가 졸업한 대학 병원에서는, 이비인후과 입원 환자는 남성의 두경부 암 환자가 너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그들의 암의 Risk인자는 음주나 담배라고 부릅니다 저는 학창 시절, 귀의 병에 걸려서 대학의 이비인후과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그런 일도 있고 여름 방학 등은 이비인후과 교실에 드나들며 공부도 겸하고 이것 저것 도와주고 있었어요 의사가 적은 의국에서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는 것을 권했지만 그 길에는 가지 않았습니다.이유는 서투른 저에는 이경이나 비경에서 소견을 구하기 어렵고 특히 이관에 통기=코에서 금속 호스를 꽂고 귀을 열것을 하는 손재주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두경부 암 환자 수술을 많이 돌아보고 안에는 안면의 절반을 절제하는 큰 수술도 있고 나는 왜도 이비인후과 의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당시, 요시나가 사유리 씨 주연의 “사랑과 죽음을 바라보고”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분명히 젊어서 안면에 골 육종이 생긴 여성이 나중에 죽이었다고 생각합니다.강렬한 인상이었습니다 두경부 암은 발생하는 곳[코·부비동에 인두, 입인두, 아래 인두, 구강 내, 후두]과 진행도에서 치료 방침이 바뀝니다.지금은 CT나 MRI 같은 진단 기술뿐만 아니라 방사선 치료나 약물 요법이 발달되어 있습니다.부위에 따라서 약물 감수성은 다릅니다.또 수술에서도 기능 온존 등이 검토됩니다.다만 당시는 큰 수술이 유일한 치료 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두경부 암의 증상은 발생 부위마다 다르지만 코 출혈(빈출 혈액=코 막힘), 인두통(인두통), 사성(세키시유츠= 흐릿한 목소리)등 여러가지입니다.또 원전 둥지로 인한 증상이 적은 경우도 많아 경부(경부=수부)림프절 종양장(림프절 종양장=전이)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어요 현재 코를 깨물어 줄 선생님의 조상이 고향의 공원에 선답니다.저의 생가는 없어졌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 방문하고 싶습니다.뭔가 선생님이 코를 깨물어 준 것을 지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것입니다.2022년 11월 02일 현대 헬츠캬아

 

error: Content is protected !!